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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에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연암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귀국 후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소개한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으로 조선 후기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출판사 서평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에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연암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귀국 후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소개한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으로 조선 후기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출판사 서평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에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연암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고 귀국 후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해 소개한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으로 조선 후기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관내정사(關內程史)는 7월 24일 경자일부터 8월 4일 경술일까지의 기록이다. 관내란 산해관 안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사상사적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이다. 고사리 사건과 「호질」이 그것이다. 백이ㆍ숙제 사당을 지나며 음식으로 제공된 고사리와 그로 인해 벌어진 사단은 왜곡된 춘추대의를 비판한 글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8월 5일 신해일부터 8월 9일 을묘일까지의 여행록으로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체험, 특히 고생하면서 가는 길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는 8월 9일 을묘일부터 8월 14일 경신일까지의 기록으로 연암이 열하에 도착하여 숙소로 배정된 태학관에 머물면서, 그곳에 있던 청나라의 고관과 과시 준비생 및 학자들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지리, 풍속, 제도, 중국 시집에 기록된 조선 관련 시화에서부터 천체, 음률, 라마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 통치하에 있는 한족 지식인의 고뇌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14일자에 수록된 목마에 관한 서술에서 연암의 탁월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은 8월 15일 신유일부터 8월 20일 병인일까지의 여행록으로 열하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기까지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17일자에 수록된 어떤 절에서 오미자를 집어 먹다가 발생한 이야기는 바로 소설의 한 장면이고, 이에 대한 연암의 교훈적 풀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


■ 책속 한문장
절에 살고 있는 중은 겨우 둘뿐이고, 난간 밑에는 바야흐로 오미자(五味子) 두어 섬을 말리고 있었다. 내가 우연히 두어 낟알을 주워서 입에 넣었다. 한 중이 멀뚱히 쳐다보다가 별안간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며 호통치는데, 그의 행동이 몹시 흉패(凶悖)하였다. 나는 곧 일어서서 난간가로 비켜섰다.
우리 일행 중 마두인 춘택(春宅)이 때마침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서다가, 그 꼴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곧장 앞으로 다가서며,
“우리 영감께옵서 더운 날씨에 찬물 생각이 나셔서, 이 자리에 가득찬 것들 중에서 불과 몇 알 아니 되는 것을 씹어 침을 돋우려 함이거늘, 대가리 반들반들한 까까중놈아, 양심도 없구나. 하늘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물에도 깊은 물이 있음을 모르는, 이런 무례한 놈아, 이 당나귀 같은 까까중놈아, 이게 무슨 짓거리냐?”
지은이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저명한 작가이자 실학자로, 호는 연암(燕巖)이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문명을 떨침으로서 장래 나라의 문운을 잡을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현실과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혐오해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랫동안 재야의 선비로 지내면서 창작과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0년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하여 요동 · 열하 · 북경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후,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조선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50대 이후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홍대용 ·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에는, 『열하일기』와 『과농소초(課農小抄)』 외에 「양반전」과 「열녀함양박씨전」 등의 한문소설을 포함한 주옥같은 산문과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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